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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隆陵)과 건능(健陵) 사도세자(思悼)와 정조(正祖)임금.

woody7553 2009. 3. 8. 16:18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하고 있는 비운의 사도세자( 思悼世子) 그리고 정조임금 (正祖)의 체취를 느낄수 있는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을 탐방 해보기로 한다. 입구에는 역사가 말을 하는듯 수령 140년의 늙은 향나무가 거의 벗은채 오른쪽 편만 간신히 잎을 메단채 받히고 서 있다.

 

 

 

잘가꾸어진 공원 형태로 관리 되고 있으며, 이곳 융릉과 건릉을 모신 안녕동의 수종(樹種)과 숲은 자연 그대로의 울창함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직감하게 된다.

 

원래 부터 있었던 한국의 태고종 적송(赤松)과 잡목인 도토리나무 참나무의 군락지임을 알수 있다.

 

 

 

 

 

 

 

 

 

 

 

 

 

약 5분간 키큰 적송의 숲길을 들어 오니 건릉과 융릉의 두갈랫

길로 나뉘이게 된다.

 

융릉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1735~1762)와 그의 비인 헌경왕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수원대학교 들어가는 입구에서 병점 태안 읍사무소 방향으로 조금 가면 융건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陵은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사도세자의 陵은 경기도 양주군 拜峯山(배봉산)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아들인 정조가 즉위를 한 뒤에 당시의 산운(山運), 연운(年運) 그리고 사도세자의 명운(命運)을 조합하여 가장 좋은 연도라고 생각된 1789년 정조 재위 13년에 이곳 화산으로 옮긴 것이다.

 

 

 

陵으로 가는 길 양옆에는 잘 자란 소나무숲으로 가꾸어져 있다. 융능교의 작은 다리 아래로 융릉의 백호와 청룡에서 발원한 물이 합수하여 흐르고 있다.

 

 

 

 

 

 

 

 

 

 

 

 

 

 

 

 

 

 

 

 

 

원형 연못 곤신지, 무척산의 김수로왕릉의 밑에도 천지연 이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사도세자(장조(莊祖)와 혜경궁 홍씨의 릉에도 길지(吉地)인 곤신지 라는 원형의 연못이 존제 하고 있다.

 

 

 

 

 

 

 

융릉을 받히는  곤신지 원형 연못이 1790년의 역사를 침묵으로 전달하고 있다.

 

 

 

 

 

 

 

 

 

 

 

 

 

 

 

 

 

 

곤진지의 옆에는 하늘을 뚫는 거대한 나무, 오리나무가 선채로 봄채비에 분주하다.

 

 

 

오리나무 이다.  과거 보러가던 길손이 5리마다 심고 뒤돌아 봤다는 나무, 성장이 빠르고 키가 높기 때문에 비유한 말일것이다.

 

그리고 이나무는 옜날부터 궁중 터를 닦거나 안압지 등의 습기 및 연못가에 잘 자라기로 이름 나 있다.

 

 

 

 

 

 

 

 

 

 

 

 

 

 

멀리 악귀를 쫓는다는 붉은 색  홍살문이 보이고 그 안쪽으로 제실 그리고 융릉의 사도세자와 그리고 헌경 왕후 홍씨의 능이, 파란 많았던 역사를 대변해 주는듯 하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왕비 홍씨(1736-1815년)의 능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 장조( 莊祖)사도세자는 1735년 창경궁에서 태어난다. 영조 12년 1736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10세의 어린 나이에 혜경궁 홍씨와 혼인하게 된다.

 

영조 38년 1762년에 간신들의 모함으로 영조의 눈에 나게 되어 뒤주 속에 갇혀 28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훗날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슬프하여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아들의 죽음을 오해로 불러 일으켰음을 후회하여 회한에 빠진다.

 

 

세월은 흘러  장조,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가 임금에 즉위하여 시호를 사도 세자 에서 장헌(莊獻)세자 라고 하게 된다. 

그후 고종 광무 3년 1809년 10월에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같은해 11월에 황제로 추존하게 된다.

 

 

 

 

헌경왕후 홍씨는  영의정 홍봉환의 딸로써 영조 28년에 세자빈이 되었고 순조 15년 (1815년)69 세에 창경궁에서 돌아 가시게 된다.

 

고종 광무 3년(1800년) 10월에 왕후로 추존 되고, 같은해 11월에 황후로 추존 되게 된다.

지금의 융릉 자리는 160여년전 남인이었던 윤 선도가 효종의 능침으로 지목한 곳이어서 조선의 최대 길지로 알려진 바가 있다.

 

華山(화산)은 華字가 꽃화로서 글자가 비유하듯 800개의 봉우리가 하나의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면서 보호하는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꽃이 피어오르는 형국이라고도 하였으며, 정조 13년 7월 11일자 조선왕조실록에 이곳의 형국이 盤龍弄珠形(반용농주형)이라 적고 있다. 여기서 반룡(盤龍)이란 용이 아직 등천하지 못하고 서리어있는 용을 말한다.


풍수지리의 상당한 식견을 가진 정조가 아버지를 길지에 모시기 위해 노력했음을 엿볼 수 있다.
본래 왕릉은 열자의 깊이로 팠다. 그러나 혈토는 그렇게 깊게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형 지세에 따라 깊이가 다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몇 자의 깊이로 판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풍수공부를 하여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정조는 이 자리가 좋은 자리라고 판단되어 이 자리는 생기를 다칠 수 있으니 혈토가 나오면 중지하라고 명하여 진토가 나오자 중단했다고 한다.
능에서 물의 흐름을 살펴보면 좌수도우(左水倒右)하여 정미파구(丁未破口)다.


용은 간인방(艮寅方)으로 입수(入首)하여 혈장을 형성하였으며, 정미파구(丁未破口)에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작묘(作墓)하면 당문파이지만 지현굴곡으로 흐르고 있어 길파로 훌륭하게 될 텐데 현재 융릉은 계좌정향으로 놓여져 있어 파구와 향이 안 맞아 안산(案山)도 뚜렷이 보이지 않고 있다.  (案山) 이란 풍수 지리학상의 뫼, 집터, 등의 맞은편 산의 가장 가운데 산의 부분을 일컬음이다.

 

 

 

사도세자,헌경 왕후의 융릉의 비 이다.

정조는 이미 영릉 천봉 때 폐지하기로 한 병풍석을 굳이 만들게 하면서 비명에 세상을 떠난 생부의 능을 왕릉의 제도로 그 격을 높여서 꾸미려고 한 정조의 남다른 심정이 모란 연화문을 장려하게 조각한 병풍석을 쓴 데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다른 왕릉들은 문인석의 모자가 사모관대인데 융릉은 금관을 하고 있으며 이마 위의 금관에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의 모습이다. 이점으로 보면 폐세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으나 추존왕릉으로 추승되기에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주목되고 릉옆에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2기씩 배치하였으며 봉분 앞에는 혼령이 앉는 의자라는 용도의 상석(床石) 혹은 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우리나라와 함께 역사와 함께 숨쉬며 살아온 한국 소나무 적송(赤松), 반만년 역사의 애환이 그대로 백성의 가슴속에 녹아 들고 있다.

환란이 있거나 먹을것이 없을때는 이 소나무, 지천에 깔린 적송의 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고, 송진을 틀어 영양분으로 공급하기도 했단다.

이곳 안녕동의 융릉,건릉에는 울창한 적송의 자연 발생 지역임을 알수 있다.

 

 

 

 

 

이렇게 크고 키높은 적송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쭉쭉 뻗어 있음에 대단한 자부심을 비로소 느낀다. 세계의 어느 수종에 내놓아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순수 한국 토종의 적송.

 

순수 혈통이 살아 숨쉬는 체험의 장을 돌아 보고 있는 것이다. 

 

 

 

 

 

 

 

 

 

 

융릉에서 서쪽으로 약 600M 지점의 뒷쪽으로 건릉 정조대왕(正祖)과 호의 왕후 김씨의 능이 홍살문을 뒤로 제실 그리고 건릉이 조용한 침묵속에 역사를 전언(傳言)한다.

 

 

 

 

 

 

 

 

 

 

 

 

건릉은 조선 제 22대 정조 임금과 왕비 효의(孝儀)왕후 김씨(1753-1821년) 의 능이다. 

정조는 사도 세자의 아들로 태어 났으며, 영조 28년(1752년)  영조 35년(1759년) 세손으로 책봉 되고, 영조 51년 (1775년)에는 영조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영조 임금이 승화하자 (1776년), 경휘궁에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제위기간동안 탕평책(봉당을 페지하고 왕권위주로 각본하되 인제 등각을 골고루 하다)을 실시하고 학문을 선호하여 규장각을 설치하게 되며, 문물 제도를 정비 보완하여 속오례의(屬五禮義) , 대전통편(大典通編), 홍재전서(弘齋全書), 등을 편찬,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 제위 24년(1800년), 49세의 많지 않은 젊은 나이로 창경궁에서 돌아 가시게 된다.

 

 

 

 

정조 임금의 건릉 비문이 보는이의 심중을 아프게 파고 들고 있으며 ---.

 

 불과 28세의 젊은 나이로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던 아버지에 대한 애끓는 애도의 정회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길지를 생각하던 중 재위13년 1789년에 정조의 고모부이며

 

살아생전 아버지 사도세자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화평옹주의 남편 박 명원이 사도세자 묘소를 천장하자는 상소를 올리자 이런 계기로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장을 알아 볼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무덤을 좋은 곳으로 모시려는 자식의 마음에서였다.

신하들이 여러 곳을 추천하여 첫 번째 문의라는 곳의 양성산은 산의 기운이 안 좋으며 두번째 천거지 장단 백학산은 국이 좁아서 안되고 세 번째 광릉 역시 혼잡스럽다하여 거절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으로 정조가 풍수에 대하여 평을 하였음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될 정도로 정조의 풍수에 대한 안목은 대단하였다.
정조는 몇몇 후보지를 살펴본 결과 가장 이상적인 자리로 지금의 자리를 택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1800년 5월 30일 남인을 중용하겠다는 취지의 '오회연교(五晦筵敎)' 발언을 한 뒤 불과 20여일 후에 갑작스레 숨을 거둔다. '부친인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의지를 밝혔고, 아울러 남인을 중용할 뜻을 표명한 일이었다.

 

정조는 종기가 악화돼 그 해 6월 24일 훗날 논란이 되는 민간요법 '연훈방'을 사용했으나 일시 증세가 호전됐을 뿐 혼미상태에 빠진다. 이 요법은 급성 수은중독 위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흘 뒤인 6월 28일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구급 처방의 일종인 '성향정기산'을 직접 올리겠다고 실내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정조는 운명했다.

 

당시 예법에도 어긋나는 처사이고, 정조와 평생을 정적 관계에 있던 정순왕후가 임종을 지켰다는 점에서 의혹은 더욱 커진다. 정조는 왕대비인 정순왕후가 들기 전에 '수정전'(왕대비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는다. '수정전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독살설의 유력한 증거로 보는 이도 있고, 후사를 당부하기 위해 정적이었던 정순왕후를 부르는 말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어찌 됐건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정권을 장악하고 정조가 펼쳤던 개혁정치는 뒷걸음치게 된다. 정조가 사망한 직후 전국 곳곳에 왕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익명의 대자보가 나붙었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간 정약용은 '여유당전서'를 통해 독살이란 표현을 남긴다. 물론 독살 여부는 아직도 미지수다.

역대 가장 박식하며 위대한 정치가 정조 대왕의 짧은 생애가 아쉬움속에 자멱질 해된다. 로마의 시-저가 그렇 했듯이 이나라의 정조 대왕 역시 개혁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쓰러져야만 했던가 ?

 

정조 대왕은 역시 세계를 움직일만한 정치가 였던가 보다.

 

 

철신 배상

09/03/08

 

Sinno Me Moro(죽도록사랑해서) - Alida Chelli


Amore,amore,amore,amore mio
내 사랑, 내 사랑, 내 사랑, 내 사랑이여
in braccio a te, me scordo ogni dolore
당신의 가슴에 안겨서 난 모든 시름을 잊죠
voio resta co'te sinno' me moro
죽을때까지 당신과 있고 싶어요
voio resta co'te sinno' me moro
죽을때까지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voio resta co'te sinno' me moro
죽을때까지 함께하고 싶어요

Nun pia'gne amore, nun pia'gne, amore mio
울지말아요, 울지말아요 내사랑이여
nun pia'gne state zitto su sto core
울지 말고 가만히 내 가슴에 기대요
ma si te fa soffri dimmelo pure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면 말해주세요
quello che m'hai da di', dimmelo pure
내게 할말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quello che m'hai da di', dimmelo pure
내게 하고 싶은 그말을 말예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주연의
알리다 켈리(Alida Chelli)가 부른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o)'
추억의 이태리 영화 '형사'의 주제곡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