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각 저생각

생멸(生滅)을 벗어난 영원한 자유에의 속으로.

woody7553 2009. 1. 8. 10:49

 

 

중생심(衆生心)은 생멸(生滅)법이다. 한시도 떠날 수 없는 탐 진 치(貪 嗔 恥)의 착(着)에 빠져 나도 모르게 짓고 저지르니 죽고 살기의 생 멸법, 윤회의 멍에를 쓰고 내키지 않는 전장 (戰場)으로 --- 아득한 고해(苦海)의 늪으로 알게 모르게 빠져 든다.

내주위의 맑고 선량한 눈동자를 외면하며 때로는 적을 대하듯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내가 살기위해 그들을 배신하고 죽일 때도 있었다. 이것이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중생심의 생멸법(生滅法)이다.  죽고 사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화두(話頭) 인 것이다.

 

 

야산(野山)의 들풀은 왜 가고 옴이 자유로운가 ? 저산의 진달래 연산홍은 왜 봄만 되면 약속이나 한듯 화려한 모습으로 살아 돌아오는가 ? 산천은 그대로 이고 영원한 생명도 의구(依舊)하다. 다만 시절 인연이 도래 할뿐, 우주의 대자연은 가고 옴에 막힘이 없다. 자유롭다. 중생계의 아득한 생멸 법을 벗어난다.

어떻게 하면 저같이 대 해탈(大解脫)의 영원한 생명을 취할 것인가 ?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 다시는 볼수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대자연의 법칙과 무었이 다른 것인가 ?

 

 

그 답을 이곳에서 찾어라 한다. "부처란 무었인가 ? 왜 부처를 삼 서근(麻三斤) 이라고 하는가 ? " 옜 날부터 조사선(祖師善)은 이 물음에서 회답을 찾는다. 달마선사 이래 1,700여 가지의 공안(話頭)이 있다지만 나는 이 질문에서 회답을 찾고자 한다.

 

왜 ? 삼 서근 이라 하는가 ? 부처란 수승한 경지의 깨친 자(者)를 일컬음인데 ---어째서 하챦은 삼 서근 이라고 하는가 ? 왜 ?마(麻) 삼근(三斤) 삼 1.8kg 이라고 하는 것인가 ? 이게 도대체 무었을 말하고자 함인가 ? 도무지 풀 수 없는 의정(疑定)이 쌓이고 또 쌓인다. 이게 무었인고 ? 분별과 구별도 없이 어째서 부처를 삼 서근 이라고 하는가 ?  아홉(9) 달을 틀고 앉아도 가슴만 답답 할뿐이다.

 

 

생멸 법을 가진 중생들의 복잡한 심리로는 이 문제에 접근 자체가 불가함을 깨닫는다. 중도(中道)를 이해해야 한다. 중도란 무었 인가 ?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친 후 녹야원의 제자들에게 돌아와 설법한다. " 나는 중도(中道)를 깨쳤다." " 세상에는 두 변이 있어 출가자는 가까이 하지 말아야한다. 첫째는 탐욕과 애욕이 넘쳐나는 일은 비열하며 하천하여 범부(凡夫)들에게서 떠나지 못하며, 현성행(賢聖行)에는 의(義)에 상응치 못하므로 이를 버려야 함이다.

 

둘째는 스스로 고뇌하고 번민하는 것은 괴로움으로써 현성행(賢聖行)이 아니다. 이는 의(義)에 상응치 않으므로 나는 이 두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로 깨달았음이다."  제자들은 이를 두고 초전법륜(初傳法輪)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중도란 무었 인가 ? 유(有)무(無),생(生)멸(滅), 선(善)악(惡), 고(苦)락(樂) 등의 대상물의 상대적 모순과 불합리를 제거(除去)하여 서로 통하게 하는 것이다. 쌍차(雙遮)쌍조(雙照) 불이(不二) 일체(一體)의 개념이다. 쌍으로 막아 쌍으로 위에서 비춘다. 서로가 막는 양변(兩辨)을 버리고 서로가 화합의 빛을 비춘다. 상대적 양변이 제거되니 가운데도 없다. 오로지 공(空)--- ! 함만이 남는다. 이 공(空)함이 중도(中道)정각 이다. 이는 한정된 형태를 벗어난 대 해탈이다. 막힘없는 대 자유, 끝없이 넓은 우주 법계가 느껴진다. 내 본래의 고유 본성(本性), 자성(自性)인것이다. 이것은 또 원어로 아녹 다라 삼막 삼보리(阿녹多羅 三邈 三菩리)의 그윽한 지위이다.

 

 

무(無)는 유(有)를 창조하고 무(無)는 무한대의 유(有)를 포용한다. 유(有)는 무(無)에서 왔으며 유(有)는 무(無)없이 존립 할 수 없다. 유(有)무(無)는 떠날 수 없는 불이(不二)이다. 즉 무불(無不)이유(異有) 유불(有不) 이무(異無)다. 무(無)는 유(有)와 다를바 없고 유(有)는 무(無)와 다를바 없다.  유무가 양변을 버리니 비유(非有)비무(非無)이며, 유뮤가 합하니 진여(眞如)의 공(空)함이 된다. 이를 중도(中道)라고 한다.

 

 

이곳에 내가 유(有)의 형상으로 존재 하며 내 곁에는 무(無)의 형상으로 또 다른 내가 있다.살아 움직임과 운동량을 힘으로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내가 존재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나는 에너지를 통하여 유형의 나를 통해 유형의 물질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곧 에너지 이다. 즉 무(無)는 유(有)를 창조함을 증명한다.

 

중도(中道)를 가장 잘 설명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인용하면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이라고 한다. 보이는 현상계는 공함과 다름없고, 공함은 현상계와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색즉 시공(色卽是空) 공즉 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한다. 현상계는 공함과 같으며 공함은 즉 보이는 현상계와 같다. 라는 뜻이다.

 

 

이를 증명하는 현대 원자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공식을 인용하면 E = MC2(제곱) 즉 모든 물체는 에너지와 질량으로 구성된 등가원리(等價原理)를 주장한다.  질량은 유형으로 형상을 가지나 에너지는 무형으로 형상이 없다. 즉 유 형상(有形像)은 공(空)한 무 형상(無形像)과 같은 등가원리(等價原理)의 현대 과학으로 이를 증명 한다. 에너지는 질량이며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과학적 증명을 내세운다.


 

 

thanks a lot to be continued for the consideration .

감사합니다. 생멸을 벗어나는 영원한 자유에의 속으로 --- 1부는 여기 까지 입니다.

제 2부를 다시 곧 올리겠습니다.

 

철산 배상

2009/01/08

쉼을 위한 국악 명상

- 그대 그리운 저녁 -




01. 저녁 ·숲 ·별빛
02. 벚꽃이 마당에 하얗다
03. 그대 그리운 저녁
04. 해질 무렵의 기도
05. 엄마와 함께 걷던 봄길
06. 찔레꽃
07. 꽃길
08. 고향에 내리는 눈
09. 어른들을 위한 자장노래
10. 작은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