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각 저생각

생멸(生滅)을 벗어난 영원한 자유에의 속으로.--->2부.

woody7553 2009. 1. 13. 10:25

 

 

중생심으로 보는 죽고 사는 생(生) 멸(滅)은 어떻한가 ?  물과 얼음의 관계를 인용해 보면 물이 얼음으로 변했을 시(時), 물의 환경에서는 멸(滅)이 된다. 반대로 얼음의 환경에서는 생(生)으로 나타난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될 때에는 얼음이 멸(滅)이 되고 물이 생(生)으로 바뀐다. 바뀔 뿐, 시절 인연만이 도래 할뿐이다. 두 물질 속에는 이쪽과 저쪽이 같은 등가원리(等價原理)로 존재한다. 우주 자연계의 법에는 이를 불생(不生)불멸(不滅), 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영원히 지속되는 불이(不二)의 진여 공함으로 존속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계의 생멸 법을 초월한 중도(中道)정각의 개념이라고 한다.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 생각하며 행동하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도 이 같으며, 사리자 시제법공상(舍利子 是諸法空相), 사리자여! 중도의 모든 법은 이렇게 서로 공(空)함이다.

불생불멸 불구부정(不生不滅 不垢不淨), 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으며 더럽고 깨끗 하지 도 않다.

부정불감 시고공중(不增不減 是故空中), 증(增)하는 것도 감減)하는 것도 없다, 그러기에 중도의 공(空)함속에는,---!

무색 무수상행식(無色 無受想行識), 현상계도 없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우리가 아는 아무것도 없다.

 

 

무안이비 설신의(無眼耳鼻 舌身意), 눈 귀 코 혀 몸 의식마저도 없다.

무색 성향미촉법(無色 聲香味觸法), 현상계가 없으니 소리 향기 맛 촉감마저도 없는 법이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無意識界), 눈으로 찾는 경계 및 알므로 찾는 의식 경계

마저도 없다.

무무명 역무무명진(無無明 亦無無明盡), 밝고 온화하나 또 밝음이 다하여 없어지지도 않으며,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늙어 죽음도 없고 또한 늙어 죽어 사라짐도 없도다.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중도의 공(空)함속에는 괴로움과 멸(滅)함의 길도 없고 알음알이 지혜도 없으며 또 얻을 것마저도 없다.

보리살타 의반야바라 밀타고(菩리薩타 依般若波羅蜜多故), 수행을 닦는 보살은 중도의 공(空)을 찾는 지혜로운 수행에 의지하므로 ----!

심무가애 무가애고(心無가碍 無가碍故),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자비로움이 가득한 무한 해탈의 경계이다.

무유공포 원리전도(無有恐怖 遠離顚倒), 그리하여 그 아늑한 중도의 공(空)함에는 공포가 있을 수 없으며 잘못된 뒤바뀜도 없다.

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夢想究竟涅槃 三世諸佛)의반야 파라밀다(依槃若波羅蜜多), 꿈에도 그리던 구경의 열반을 얻은 삼세제불의 부처님도 중도의 공(空)함을 찾는 지혜의 수행에 의지하여 ----!

고득 아녹다라 삼막삼보리 (故得 阿녹多羅三邈三菩리), 마침내 중도의 공(空)함을 터득 했으니 이것이 곧 진여의 법성, 공(空)함속에 생멸(生滅)이 없는 영원한 삶의 중도(中道)법계(法界)이다.

 

 

부처를 물었는데 삼 서근(麻三斤)이라 했다. 왜 부처를 보고 삼 서근 이라고 하는 가 ?


이제야 약간의 접근이 허용된다. 양변을 버리고 가운데마저 버린, 유(有)무(無)를 버리고 구분과 차별을 버린 쌍차 쌍조(雙遮雙照), 불이(不二)의 공(空)한 중도 개념이 이의 접근을 허용한다.

삼 서근은 차라리 중도에 의지한다. 중도는 " 아녹다라 삼막삼보리" 의 공(空)한 무심의 경계이다.

이는 곧 대 해탈(解脫), 걸림 없는 정광무애(靜光無碍), 대 적광(大寂光)의 우주보다 넓은 대 자유의 경계이다.


그것은 또 무심반야(無心槃若)의 지위이다. 반야(槃若)중에 가장 으뜸으로 치는 무심 반야의 경계이다. 6-7지의 의식과 망념을 전부 다 쏟아 버리고 제8 아라야(Araya)의 미세 망념(忘念)까지도 전부 다 씻어버린 경계, 그것도 모자라서 10지 등각의 보살이 고요의 정(定)에 빠져 크게 죽은 상태에서 공안(話頭)의 깊은 의정(疑定)으로 다시 깨어 살아난 견성(見性)의 경지 이다.

내외 명철(內外明徹)한 안과 밖이 두루 투명하게 뚫린 진여의 공(空)함이 환하게 밝아 안의 이 마음과 밖에 이는 저마음의 유혹에 조금의 미동도 없이 처연하다.

 

 

없는 마음에 100층짜리 고층 빌딩을 지어 올려도 이 마음이 없으니 강변에 쌓아올린 모래성, 허상이다. 금은보화로  온몸을 치장하여 유혹하나 이 마음이 없으니 삿된 잡철에 지나지 않는 허상(虛像)이다. 그것은 무심 삼매, 대원의 경지(大圓鏡智)이다. 제 8아뢰야 무기식이 다 끊어지고 진여본성이 발현하는 구경의 경지, 상(常)적(寂)광(光)이 충만한 환히, 밝은 경계, 상(常)은 법계이며, 적(寂)은 해탈이며 광(光)은 지혜로 내외 명철(內外明徹),안 밖이 환하게 자등명(自燈明)한 묘각의 여래지(如來志)경계이다. 밝음과 지혜로 충만하여 온 누리를 환하게 방광 하여 비춘다.  태상(太上)의 지위, 석가모니 부처의 경계이다. 이것이 중도(中道) 이다 중도(中道)의 깨침은 곧 석가모니 부처를 봄이다. 그런고로 중도(中道)가 곧 견성(見性) 이다.


실제로 중생심은 탐착에 빠져 허상 속에 살고 있다. 어두운 밤 나무그루터기를 보고 도깨비로 착각함과 같다. 또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오인하여 상대법을 만든다. 상대법은 생멸 법이라 영원하지 못하다. 언젠가는 하나가 없어져야 하는 세간 법이다.  본래 없는 공(空)함의 우주 자연 법계에 착각하여 만들고 저지른다. 그것이 허상이며 포말 위에 마천루를 짓는 것과 전혀 다름없다.

 

 

고 조사는 말한다. "종일토록 보나 그것은 보는 것 없는데서 나오니 그것 역시 허상이며 무심이다. 종일토록 들으나 듣는 것 없는데서 나오므로 허상이며 무심이다. 종일토록 느끼나 느낌 없는데서 나오므로 그것 역시 허상이며 무심이다. 종일토록 알아보지만 그것은 앎이 없는데서 나오므로 아는 것 역시 허상이며 무심이다. 종일토록 짓고 만드나 짓는 것이 지음이 없으므로 지음역시 허상이며 무심이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짓고 하는 것이

본래 없는 공(空)함에서 왔으므로 허상 이며 상대법이다. 고로 무심(無心)인 것이다.


내 본래의 면목이 진여의 공(空)함인데--- 어느 듯 억겁을 도는 윤회(輪廻)의 고(苦)를 돌아 두터운 업장의 구름이 온몸을 휘감아 찬란한 저 태양을 볼 수가 없어라.

어떻게 하면 온몸을 뒤덮은 두꺼운 구름층을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 내어 자성(自性)을 찾는 중도(中道)를 증득(增得)할 수 있는 것일까 ?

 

 

부처를 물었는데 --- 삼 서 근 이라 한다. " 왜 ? 부처를 삼 서 근 이라고 하는 가 ?" 묻고 묻는 의정(疑定)의 화두(話頭)속에 먹장의 두터운 구름층이 한 겹, 한 겹, 무심(無心)삼매(渗昧)속에서 벗겨짐을 느낀다. 무심의 공(空)함 속에서 -----!!


고 조사께서도 그러했듯이 중도(中道)는 결국 무심반야(無心盤若)에 귀의 회향(廻向)한다. 무심 반야는 아녹 다라 삼막 삼보리, 진여(眞如)의 청정한 공(空)함인 중도(中道)에 하심(下心)한다.


감사합니다.

견성 하십시오.

2009년을 맞이하면서 ---

철산(徹山)배상(拜上)

2009/1/07.

쉼을 위한 국악 명상

- 그대 그리운 저녁 -




01. 저녁 ·숲 ·별빛
02. 벚꽃이 마당에 하얗다
03. 그대 그리운 저녁
04. 해질 무렵의 기도
05. 엄마와 함께 걷던 봄길
06. 찔레꽃
07. 꽃길
08. 고향에 내리는 눈
09. 어른들을 위한 자장노래
10. 작은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