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부산 광안리 광안대교 위의 불꽃 축제 !

woody7553 2008. 10. 19. 12:54

 

밤의 광안대교는 현란한 빛의 축제와 함께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4년째 이어져 오는 광안대교 위의 저녁 8시부터 시작되는 불꽃축제는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한밤의 가을축제가 되고 있다. 오후 3시경부터 몰려들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행렬은 부산시의 도시 교통을 밀리게 한다.

해마다 줄잡아 약 120만명이 일시에 몰려드는 대 혼잡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다.  10/18일 몰린 인파의 집계도 약 140만명. 기록적인 숫자이다. 금년가을은 예년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아직도 덥다. 낮에는 28도-30도를 올라가는 �더위가 계속되고 있음도 하나의 원인이 될수 있겠다.

 

밤 하늘에 펼쳐지는 불꽃의 축제는 8시 시보와 함께 첫발이 터져 올라간다. 내 주위에 구름처럼 겹겹이 둘러싼 관중들의 입에서 와-- 하는 환성과 괴성이 터져나온다. 아름다운 시간이 밤하늘에 찬란하게 수놓듯 꿰어지고 있다. 불꽃 놀이는 특히 중국의 불꽃이 유명하다하는데 과거 측천무후(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자황제)가 이불꽃놀이를 매우 좋아하여 즐겨 사용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625~705. 12. 16.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

본명은 무조(武曌). 무후, 무측천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고종(高宗:649~683)의 비(妃)로 들어와 황후(皇后)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다. 생애 마지막 15년(690~705) 동안은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썼다. 무후는 당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 제국을 통일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한 시기였다. 태종의 후궁으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649년 태종이 죽을 무렵 이미 태자(후의 고종)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죽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어 불사(佛寺)에 은거하고 있던 중 신임황제인 고종이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고종은 마침내 무후를 궁중으로 데려와 소의(昭儀)라는 비의 지위를 주었다. 무후는 먼저 궁중 내의 비빈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후를 폐위시키고 655년에는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무후와 고종 사이에 4남 1녀가 태어났다. 무후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이들은 무후가 황후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던 대신들이었다. 그들이 반대한 주된 이유는 무후가 고관(高官)의 딸이기는 하지만 귀족가문의 태생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들은 또한 무후가 선제(先帝)인 태종의 후궁이었다는 점을 들어 무후와 고종의 관계는 근친상간이 되므로 그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60년이 되어 무후는 반대파를 파직·추방·처형시킴으로써 모두 제거했다. 황족인 고종의 숙부마저 주살했고 그의 일가도 모두 유배당하거나 몰락했다.

 

고종이 오랫동안 중병이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무후가 전권을 장악하여 고종의 병약함을 핑계로 통치를 해나갔다. 천성이 나약했던 고종은 무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고, 고종이 죽기까지 23년 동안 무후가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 무후는 모반의 가능성이 있는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나갔고 그 정적이 자신의 피붙이일 때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도전세력이 있을 때 자신을 지원한 사람들 중 인재들을 중용하여 제국의 행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해나갔다. 무후는 뛰어난 행정수완, 용기, 과단성 및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태도 등으로 인하여 궁중 내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은 받지 못했으나 존경은 받았다.

 

  

655~675년에 당제국은 무후가 중용하여 승진시킨 군사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신라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태자인 철(哲)이 즉위하여 중종(中宗)이 되었다. 중종은 위씨(韋氏) 가문의 여자를 황후로 삼았는데 위황후는 중종이 선제인 고종만큼이나 나약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무후와 같은 지위로 격상시키려 했다. 한 달 뒤 무후는 중종을 폐위시켜 추방해버리고 둘째 아들인 예왕단(豫王旦)을 즉위시키니 이가 곧 예종(睿宗)이다. 예종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고 실권은 모두 무후의 손에 있었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당조 지지세력과 야심만만한 젊은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몇 주 지나지 않아 황실을 지키는 충성스런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무후가 관군을 동원하여 손쉽게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의 규모를 과시하자 무후의 정치적 기반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였다.

 

 

6년 뒤인 690년 65세의 무후는 왕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15년 동안 황제로서 통치했다. 이 시기에 황위계승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무후의 친정인 무가(武家)의 조카들은 무후가 이미 국호를 주로 바꾸었으니 이가(李家)의 당조 후계자들을 제치고 무씨의 조카들 중 한 사람에게 황위를 물려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무씨 조카들이나 그 아들 중에는 대중적 인기가 있거나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한편 무후의 친아들인 전 황제 중종과 예종은 지지세력이 없었고, 능력은 더욱 형편없었다. 그러나 무후의 충성스런 측근들 사이에서도 당조를 세운 이가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커져갔다.

 

 

698년 무후는 충성스런 측근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유배된 중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태자로 책봉했다. 이같은 결단을 내린 것을 보면 무후가 대단한 성품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무후는 황위계승에 있어서 자신의 가문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조카를 후계자로 지목하지도 않았다. 무후는 자신의 가문을 흥성하게 하겠다는 야망은 없이 단지 임종시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진 듯했다. 699년경 말년의 무후는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의 장씨 형제에게 총애를 베풀었다. 이들은 기예(技藝)를 가진 간신들로서 기발한 연회와 수단 좋은 아첨으로 무후의 총애를 받았다. 장씨 형제들은 궁중 사람들과 대신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게 되었고, 이들은 무후에게 장씨 형제의 해악을 경고했다.

 

 

무후는 이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중병에 걸려 전보다 더 장씨 형제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705년 2월 대신들과 장수들이 모반을 일으켜 궁중을 장악하고 장씨 형제를 처형한 뒤, 늙고 병든 무후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무후는 중종에게 양위한 뒤 다른 궁으로 옮겨가 살다가 705년 12월에 죽었다.

 


무후는 사회적 지위와 관계 없이 유능한 사람들을 직접 골라서 쓴 탁월한 통치자였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주된 동기였지만 무후가 시행한 정책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당대의 중국사회가 군사적·정치적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에서 사대부 가문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된 것은, 무후가 추진했던 정책의 결과였다.

 

 

무후의 통치정책 중 이러한 측면이 갖는 중대한 의미는 오랫동안 중국사가들의 편견에 의해 가려져왔다. 이들은 무후가 왕위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는 점을 들어 무후의 치적을 과소평가해왔다. 무후는 확고한 기반 위에 새로운 통일제국을 확립했고 필요한 사회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당조의 안정은 공고하게 되었고 중국 문화사상 가장 결실이 많은 한 시대를 가져왔다.

 

 어쩌면 너무 화려했으면서도 뼈를 깍는 고독과 자기 방어를 위한 처절한 투쟁이 어떤 누구도 믿을수없는 고뇌의 경지로 몰아 넣었고 오로지

밤 하늘에 아롱지는 영롱한 불꽃의 아름다움만이 만신창이가 된 마음속의 고적병을 유일하게 위로해주던 불꽃놀이의 유래가 이곳 측천무후에게서 유래된다. 

 

 머리위에서 크다른 폭죽의 굉음이 우루루---흡사 뇌성처럼 지나간다 연이어 터지는 아름다운 불꽃은 하늘높이 2중 3중으로 터지며 아름다운 꽃을 밤하늘에 그려 넣는다. 주위에는 감탄의 괴성이 와---! 하며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인파속에 애완견 까지 폭죽의 굉음을 싫어하여 짖어된다. 오늘 1시간동안 약8만발의 폭죽을 쏘아 올린단다. 완연한 축제 분위기다.

 

중국에서 1,000여명의 관광객이 초청되였고 미국 일본에서  많은 수의 손님들이 이곳 부산 광안대교 불꽃 축제 년례행사에 초청되어 오늘 이시간을 함께 즐기고 있는것이다. 대교 밑의 한편에는 크루즈호의 여객선이 불꽃 축제 관람을 위해 정박해 있다. 이행사의 치안과 안전을 위해 부산시 경찰병력 5,000여명이 투입되여 있다.

 

불꽃이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듯하고  불꽃의 축제는 밤 깊은줄을 모른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아지는 감탄사의 연발로  기억하�은 밤하늘의 아름다운 사연을 곱게 곱게 수놓고 있다.

 

광안리의 밤하늘에는 자욱한 불꽃놀이 후의 매케한 화약연기 그리고 화약냄세가 하늘을 뒤덮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한 점을 고려한 가장좋은 시기는 바람이 부는 청명하며 쌀쌀한 날씨가 불꽃놀이의 최적 조건이란다. 뿌옇게 끼인 연기를 불어 날려주기 때문일것이다.

 

멀리 보이는 광안대교 위의 야경과 불꽃의 폭죽이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상하리 만치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광안대교가 지어지기전에는 높은 파도가 일렁거렸는데--- 대교 건설이후 거짓말같이 대교안쪽의 바닷물이 호수처럼 고요하며 잔잔하다. 폭죽은 하늘높이 오르고----!!

 

광안대교 위의 조명이 끄지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광안대교를 불태울듯이 폭발하는 불꽃 놀이의 진수---!! 오늘 8만여발의 불꽃이 부산 광안대교위 그리고 광안해수욕장에서 화려하게 쏘아 올려졌다. 아름다운 바다의 도시 부산을 더한층 아름답게 인식시키는 불꽃놀이 축제는 아름다운 이 가을의 밤을 환호하는 시민들과 함께 화려하게 수 놓아지고 있다. 

 

 

철산 배상

2008/10/19.

 

 Jeanette Alexander / Open Sky(2004).....전 12곡

미국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며 레코딩 아티스트로서
1998년 'Still Point'로 데뷰했다. 그녀의 앨범 "Open Sky"는 수록
곡중 "Common Ground"가 국내 포스코 CF에 사용되면서 그녀의
부드럽고, 감성적이며 영롱한 피아노 연주곡들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뉴에이지 뮤지션이다.

대부분 뉴에이지 앨범이 그렇듯 그녀 역시 잔잔하고 서정적이며
투명한 피아노 연주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제공한다. 그리고
피아노와 함께 바이올린이 중요한 요소로 참여하여 첼로, 오보에, 기타
등과 어우러져 다양한 구성과 풍성한 편곡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Open Sky]는 수록곡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감성, 특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연에서 내면으로의 이동...거기에는
분명히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출렁이는 바다의 드넓은 곳으로 막 떠나려는
모습을 삶에 비유해 수많은 꿈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Setting Sail’에서 그래미 수상자들인 오카리나와 오보에 연주자 낸시
럼블, 그리고 기타리스트 에릭 팅스태드와 함께 한 ‘Common Ground’
그리고 환상적인 여성 스캣과 심오한 바이올린의 혼을 느낄 수 있는 앨범의
백미인 ‘The Road to Caernarvon’ 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듣는 이의
정서로 이입되는 자넷 알렉산더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개별듣기 (노래제목 클릭)

01. Setting Sail (닻을 올리며)

02. Common Ground (공감하는 것들)

03. Upon Your Return (귀향 후)

04. The Road to Caernarvon (캐어나본으로 가는 길)

05. Because of You (당신 때문에)

06. Knowing (알아가는 것)

07. When I See You (당신을 바라볼 때면)

08. Out of the Blue (울적함에서 벗어나)

09. Full Moon Circle (보름달 원주)

10. New Friends (새 친구들)

11. Letting Go (떠나보내며)

12. Shadow of the Sun (태양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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