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서식하고 있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이 곳 영도는 섬이기 때문에 이들 맹수들이 없이 안전하였고, 또한 먹이(조개, 생선, 열매)를 구하기가 좋았고 기후가 따뜻하여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으며, 신라시대부터 선조 중기까지는 목장으로 말을 방목한 곳으로 유명하다. 영도의 원래 이름은 절영도(絶影島)였다. 절영도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못 따라 올 정도라 하여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을 붙여 절영도라 불려졌다.
영도의 육지와 인접한 섬으로써 말을 방목하기에 적당한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어 예로부터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마장(國馬場)이 있었으며 명마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열전」김유신의 조항을 보면 신라 33대 선덕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의 공을 되새겨 김유신의 적손(嫡孫) 김윤중에게 절영도 명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서도 후백제의 왕인 견훤이 절영도 명마 한 필을 고려 태조인 왕건에게 선물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 에도 영도를 「마키노시마(牧島)」라고 했는데 일본말로 말 먹이는 목장의 섬이란 뜻이다.
영도는 신석기시대의 동삼동패총, 영선동패총 등으로 보아 부산지방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곳이라 추정된다.
패총이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쌓여 생긴 것인데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사람들이 쓰던 유물이 썩지 않고 잘 남아 있어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영도는 선사시대에 여러 가지 생활여건이 당시로는 사람살기에 가장 알맞은 곳 이었다
영도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학맥설(鶴脈設)이라 한다.
선사시대부터 영도는 산림이 울창하고 초목이 무성하여 목장으로 적격이었고, 수목이 청청하여 청학이란 이름이 유래되어 오늘의 청학동이라는 동명도 유래된 것이라 본다. 통계학적인 풍수설에 의하면 해운대에서 영도를 바라보면 마치 학(鶴)이 남쪽으로 나르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선사시대에는 동삼동과 지금의 해양대학교가 있는 아치 섬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고 아치 섬은 학의 왼쪽날개이며, 현 신선동을 거쳐 남서쪽의 남항동이 오른쪽 날개이고, 봉래산 산정은 학의 둥지로 남쪽으로 나르는 학맥설로 단정되었다고 한다.
왼쪽 날개격인 아치섬이 지형변동으로 동삼동 사이가 몰락되어 바다가 되므로 왼쪽 날개가 잘렸다 하여 영도에는 다음과 같은 액운설이 전래되어 왔다.
* 영도의 원주민은 흥망성쇠가 무상하여 타처로 이주할 것이며,
* 외지에서 이곳 영도에 이주한 자는 흥성하되 20년을 넘기지 못하며,
* 영도는 그림자 없는 섬이라 대대손손 면면치 못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이 전해져 왔다.
지금은 아치섬과 도로로 연결되어 있고 수년간의 새마을운동으로 영도를 깨끗하고 풍요로운 구로 만들어 많은 발전과 미래를 향한 발전을 계속하고 있어 지난날의 액운 설은 이제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생도(生島, 주전자 섬)
영도의 절경인 태종대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바위섬들이 솟아있다. 그중 유독 섬 하나가 주전자처럼 생겼다고 하여 사람들은 주전자 섬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이 섬에서는 용변을 보거니, 불을 피워서도 안 되고, 남녀가 정을 나누어도 안 된다는 세 가지 금기사항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옛날 한 어부가 주전자 섬에서 고기를 잡다가 갑자기 용변이 마려워 어구를 설치해 놓은 채 용변을 보았더니 그 날 이후부터는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어구만 계속 잃자 화병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고 한다.
또 같은 마을에 사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다가 매서운 추위를 이기지 못해 주전자 섬에서 불을 피웠는데, 이 때 근처에 있던 늙은 어부가 이 섬은 옛날부터 불을 놓으면 큰 재난을 당한다는 말이 있어 당장 불을 끄도록 했으나 어부들은 예사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이상하게도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으며 그 날 밤 꿈속에서 어부들은 주전자섬이 불덩어리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후부터 이들이 하는 일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끝내는 원인 모를 병으로 앓다가 모두 죽고 말았다 한다.
또 하나는 남녀가 정을 일으키면 벼락을 맞거나 큰 봉변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로서 이 곳 주전자 섬에 낚시꾼이 많이 오가지만 이 세 가지 금기사항으로 섬이 깨끗하게 보호되고 있다.
봉래산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면 장사바위가 있다. 옛날 키가 9척이요 힘이 천하장사인 거인이 영도의 깊은 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 거인은 매일 마을로 내려와 밥을 얻어먹었는데 한끼에 쌀 한 말을 거뜬히 먹어치웠다. 마을에서 염치없이 밥을 얻어먹던 거인은 주민들에게 보답을 못해 송구스러워했다.
어느 날 거인이 마을서 저녁밥을 얻어먹을 즈음에 형체는 없고 커다란 그림자뿐인 괴물이 나타나 마을 처녀를 잡아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후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여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으나 거인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고심하던 거인은 마침내 앞바다서 괴상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격투를 벌인 끝에 그림자를 껴안고 죽고 말았다. 이 그림자는 바로 이무기였다.
주민들은 거인의 시체를 거둬 봉래산 밑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그 후 거인의 무덤이 큰 바위로 변했는데 이 바위 모양이 마치 장사의 신발같아 오늘날 이 바위를 장사 바위라고 부른다.
지금의 유한여객 버스종점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아리랑고개라고 한다. 영도에 찻길이 생기기 전에는 동삼동과 신선동을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 옛날 이 고개는 산림이 울창하고 험한데다 길마저 구불구불하여 울면서 넘어간다 하여 아리랑고개라 한다. 당시 동삼동 앞바다에서 많이 잡힌 생선들을 머리에 이고 부녀자들이 도적들이 들끊었던 이 고개를 지나 부산장(현 부산진시장)까지 걸어가 팔아야 했던 고생스런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조내기 고구마는 옛날 영도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다. 청학동, 동삼동 일원의 황토밭에서 재배하였으며, 붉은 색깔을 띠며 아주 작은 이 고구마의 맛은 잘 익은 밤맛에 비견 될 정도다. 일제때도 목도의 고구마로 명성을 떨쳐 일본인들은 이 고구마를 구하기 위해 영도에 줄을 이었다고 한다. 특히 조내기 고구마중 일산배기 고구마 맛이 일품이었는데, 현 청학2동에서 태종대로 가는 간선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천리교 포교소가 나온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조그만 산등성이가 나오는데 이 곳이 일산배기이다. 옛날 조내기 고구마를 생산했던 이 일대는 지금 거의 주택지로 변모하여 자취를 찾기 힘들다.
큰 바위 암벽으로 이루어진 영도, 일본말 (가게시마) 는 옛날부터 무수한 전설로 이루어진 신비의 섬이다. 작은 섬치고 이렇게 인구가 조밀하게 꽉들어찬 이유도 필경 있을것이다. 지금도 봉래산 산신 할매는 말한다. " 살기가 힘드느냐 ? 영도 가게시마로 오느라 !먹고 살게는 해주마---! 그러나 영도 가게시마를 벗어날때는 모조리 벗고 나가야 한다." 할매의 훈령이다.
너들겅의 돌무듬이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이 태고의 신비스러움이되어 영도 봉래산 중턱에서부터 산신의 정기가 짓푸르게 내려 누르는듯 하다. 과연 산신이 사는 신령한 산답다.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주위로 무성하게 욱어진 태고의 숲이 이채롭다.
도(道) 닦인 봉래산의 태고의 숲은 어느듯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고---- 아름다운 가을의 노래는 봉래산 정상으로 메아리 진다.
4 인의 형제들은 봉래산 할매 친견차 보모도 당당하게 역사속의 봉래산으로 들어간다. " 무병장수 사업대박 재수대통을 염원합니다."
자주 봉래산을 �아야 겠다는 생각이 4인의 가슴속에 뜨겁게 샘쏟는다.
부산 항구밖으로 점점이 뜨있는 수많은 배---!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항구밖으로 밀려 났다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사연이 줄줄이 얽혀 있는듯 하다. 멀리 수평선과 맞다은 하늘에는 운해(雲海)의 짙은 구름이 무겁게 내려 앉는다.
이곳이 호국관음사 봉래산 정상가는 들머리가 된다. 계룡산처럼 도(道)닦는 사찰,암자등이 즐비하게 입구부터 막아선다.
서총장의 베낭에 봉래산 할매에게 올릴 생탁 막걸리가 들어 있음이 보인다.
다닥 다닥 옆으로 소제(所在)하는 또다른 사찰 영광사. 그옆으로 석파가 지나친다. 말리지 않으면 한번 들어가 볼 기세다.
서총장의 정면에 또다른 사찰이 눈에 보인다. 이름하여 봉래산 미륵불 대법사 이다. 30도로 가파란 언덕베기를 오르며 연신 만나게 되는 영도 봉래산 도 닦는 사찰들이다. 의외로 서총장 잘 올라간다.
미륵부처님의 불상이 그윽하게 아래로 하심하고 계시고---- 인간의 마음이 탐진치에 몰입되어 거짓과 위선위에 또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쉬우고 사실인듯 속고 살며---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고 어두운곳에서 나무 그루터기를 보고 도깨비로 오인 혼비백산 하듯, 중생심은 그렇듯 무지한 것이다. 한번 밝힌 등불이 천년의 깜깜함을 일시에 환하게 날리듯 헤쳐나오기를 바랄뿐이다. 그윽한 미소는 만인의 가슴에 샘쏟듯 번져 나가고----!!
끝없이 이어지는 봉래산 중턱의 사찰 그리고 암자---! 봉래산 극락암이다. 과거 부터 이곳 봉래산이 도 닦는 기도처 였음을 새삼스럽게 알게 한다. 한때는 이들 암자 사찰 모두 봉래산의 정기로 흥(興)했을것이다.
오르다 보니 또 나타나는 호국관음사 이다. 이렇듯 사연이 많은 영도 봉래산 인것이다. 오른쪽 샛길로 여산과 서총장이 땀을 흘리며 오르고 있다.
태고의 숲과 나무, 바위,너들겅이, 나타나는 본격적인 산행 들머리 언덕배기에 보이는 봉래산 할배 사당이 나타난다. 봉래산 할매는 옜날부터 이야기를 들어 왔기에 저만치 벤치에 쉬고있는 젊은 부부에게 물어본다. " 할매 사당은 어디에 있습니까 ?" 바로 아랬쪽을 가르키며 " 저곳입니다" 한다.
이곳이 할매사당 이라는데--- 현제는 출타중이라 들어갈수 없단다. 안에 법당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는데 문을 잠궈놓아 들어걸수가 없었다. 그때 안에서 "이곳은 사진 찍어면 안됩니다." 안에서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듣기로는 봉래산 정상의 바로 믿에 큰돌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신령한 할매가 주석한다는 옜날 전설을 듣고 있다.
오늘은 석파의 오랜만의 등반이라서 그런가 ? 여유가 한참 묻어남을 본다. 해병대 군대생활의 추억담을 이야기 하는중이다. 군대생활중 극기훈련, 뱀잡아 먹는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 웃음을 참는 서총장 ,여산. 얼마나 제스츄어를 쓰가며 이야기를 잘하는지 손이 안보인다.
뱀을 잡는데--엄지손가락 하나만 가지고 왼손에 칭칭 감긴 뱀대가리를 꼭꼭 누르고 뱀목을 따서 이렇게 쭉 땡기면 껍대기가 쭉 벗겨지는데----- 설명하는 석파의 오랜만의 여유도 높이 살만 하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는 두사람의 표정이 더 가관이다. 두사람 지금 완전히 뱀장사 석파에게 홀딱 넘어 간상태다. ^^*---!! 어이 징그려워----!
생뱀은 절대로 못먹겠습니다." 대대장에게 기압받고 " " 그러면 너는 한번 봐준다 구어서 먹어라 " 입안 가득히 구운 뱀을 먹는 시늉을 하는 석파 ! 못말리는 사나이 중의 한사람이 틀림없음. 뱀을 요리해서 먹는 수준이니 그까짓 뻔데기 쯤이야 자기네들 수준에서는 맛있고 깨끗한 음식이지----! 충격 충격 ! 여기 앉은 3사람 뻔데기 먹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재들입니다. 철산은 안먹음 ! 재밋어하는 여산회장, 서총장 ! 재미 있을것도 없다 별걸---!! 어 징그러워 !!
오늘 석파 난리 났다. 봉래산 정상의 산신 할매에게 사들고간 막걸리로 동서남북에 서총장 "고시레" 하고난후 생탁 일잔 돌리며 한잔 하는데--- 여기서 새로 짓는 지수집 큰나무 3그루에서 아까 뱀이야기 또 나온다.--- 이번엔 머리에 해적선의 선원처럼 붉은 수건을 메고 " 뱀 " 이야기가 나오니 섬뜩하다. 와 ! -- 오늘은 정말 그넘의 뱀 때문에 미치겠다. 큰나무 3그루 안자른것은 너무 잘했고----!!
양지바른 절영도의 아름다운 단풍은 어느듯 가을을 부르고 있다. 연기연멸의 시절인연이 있을뿐이다. 생멸이 없는 바뀜이 있을뿐이다. 이렇듯 언젠가 돌았던 그길을 오늘 너가 가고 내일 또 내가 갈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길로 돌아 올것이다.
형제들이여--! 항상 건강하시고 몸좀 제발 아끼시라--! 또 새로운 동생 카사노바 Qnam을 베려 놓을 차례인가 ? 그날의 젯빛 하늘을 부르짓던 청사포의 일렁이는 파도는 옛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영도 봉래산을 종주 횡단하여 목장원으로---> 다시 영선동 고동 물회집으로---> 해운대 청사포로 이어진 긴 여정이 새까만 밤을 칠흑으로 물들이고 있다.
목장원의 윗길을 관통하여 자봉, 손자봉을 거쳐 내려 오면 이곳 목장원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곳에서 여산의 안내로 말로만 듣던 유명한 용설란을 볼수 있었다.
목장원 윗 수목장에 있는 용설란 이다. 여산의 말에 의하면 50년만에 한번 꽃을 피우고 그대로 죽는 휘귀한 란(蘭) 이란다.
청사포의 쪽빛 바다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영도 봉래산 종주는 이정도에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다음에 다시한번 �을 계획을 하면서 ^^*---!!
감사합니다.
철산 배상
2008/10/15
베트남 출신 여가수 Ngoc Lan (능옥 란)은 젊은 시절, 나짱에 살면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다양한 지역행사에서 공연을 하였다. 그녀는 1980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네소타에 정착하게된다. 2년 뒤에는 대부분의 연예활동이 활발한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녀는 딘 티엥과 호아이 후옹 같은 지역 카페에서 노래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능옥 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능옥 란은 첫 CD앨범을 다란이라는 타이틀로 출시하였다. 그녀는 리츠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며 세련되어졌고 특유의 목소리와 무대매너로 사랑을 받게 되었다. 능옥 란은 2001년 3월 6일 화요일 오전 8시 25분, 남부 캘리포니아의 벤코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릴적 이름이 마라아 탄 란 르 였던 그녀는 1957년에 출생하여 사랑하는 많은 팬들에게 달콤한 목소리의 기억을 남긴채 44세를 일기로 떠나게된다.
그것은 오랜시간 다가올 음악의 유산으로 맴돌 것이다.
Quand sur la plage En liberte Mais sur la plage |
해변위에 펼쳐진 자유로이 하지만 해변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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